에이드리언 홍은 자신이 혁명을 수행하는 “자유의 투사” 조직을 이끌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은 그들을 이미 배신했는가?
수키 김 2020년 11월 16일
김정은의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비밀조직망인 자유조선은 북한 임시정부 설립을 목표로 한다.
2019년 2월 22일 오후, 키가 큰 한 동양인 남성이 마드리드 주재 북한 대사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의 명함에는 토론토와 두바이에 지사를 두고있는 회사, 배런 스톤 캐피탈의 투자자인 매튜 차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대사관에 들어가자 20-30 대의 남성 9 명이 공기총, 칼, 금속 막대를 들고 뒤따라 들어갔다. 그들은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케이블 타이와 수갑으로 4명의 대사관 직원을 묶어 회의실에 가둔 다음, 대사관 고위 관리를 지하로 데려갔다. 그의 아내와 8살짜리 아들은 1층 방으로 들여보냈다.
약 30분 후, 근처 체육관의 한 직원이 대사관 옆을 지나가다가 2층 발코니에서 뛰어내려 얼굴에 피 묻은 여성을 마주쳤다. 체육관 직원은 구급차를 불렀고, 구급차가 도착하자 그 여성은 의료진에게 대사관에 침입자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대사관의 초인종을 울렸다. 그 키 큰 동양인이 이번에는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를 달고 나와 경찰에게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저녁 9시 40분, 대부분의 남성은 대사관 차량을 타고 떠났다. 오스왈도 트럼프라는 이름으로 예약된 우버 택시는 근처에 차를 세웠다가 마지막 2명의 조직원을 태우고 떠났다. 그 후 대사관 직원들은 구타를 당하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대사관을 나왔고, 경찰은 매튜 차오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신분증을 발견했다.
당시는 미북관계가 민감한 시기였다. 2017년, 양국은 마치 전쟁 직전에 있는 듯 했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북한이 미국에 대한 도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달 후, 북한은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트럼프는 첫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겠다고 경고하고 김정은을 “로켓맨”이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이후 트럼프의 심정이 변했는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김정은을 만났다. 미북 정상이 양자회담에서 만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트럼프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김정은과 함께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사관에서 일어난 사건은 트럼프와 김정은이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하노이에서 재차 만나기 5일 전에 발생했다. 스페인 정부는 조사에 착수했다. 3월 13일, 스페인 일간지인 엘 파이스는 이 습격사건을 CIA와 연결 지어 범인들이 현재 미국과의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전 스페인 대사 김혁철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노이 정상 회담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백악관은 북한이 거의 아무런 대가 없이 모든 제재 중단을 요구했으며 이로 인해 회담이 결렬되었다고 주장했다.
3월 14일, 또다른 스페인 주요 일간지인 엘 문도는 한국 정부도 이 대사관 사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워싱턴 포스트는 사실 천리마 민방위라는 “비밀 조직”이 대사관을 습격했다고 보도했다. 곧 스페인 법원은 연루자들을 미국, 한국, 멕시코 시민으로 확인하고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3월 말, 북한 외교부는 이 침입 사건을 ‘중대한 테러 공격’이라고 불렀고, 스페인 당국에 ‘테러리스트와 배후 조종자들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멕시코 국적자, 주 스페인 북한 대사관에 침입 혐의로 기소”라는 헤드라인이 떴을 때 나는 뉴욕에 있는 집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뒤이어 나온 이야기는 천리마 민방위의 리더가 에이드리언 홍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2003년 당시 나는 새로 출간한 신간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코넬에서 열린 한인 학생 컨퍼런스에 초청받았는데 그곳에서 에이드리언을 만났다. 에이드리언은 예일대 학부생 대표였다. 그때 잠시 이야기를 나눴지만 2014년 그가 트위터와 이메일을 통해 나에게 연락하기 전까지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나는 당시 평양에서 6개월 동안 북한의 미래 리더가 될 270 여명의 북한 젊은이들과 함께 갇혀있는 시설에서 잠복 생활을 하면서 보도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Without You, There Is No Us: Undercover Among the Sons of North Korea’s Elite,” (한국 번역본:평양의 영어 선생님)라는 책을 출간했다. 에이드리언의 메시지는 끈질기면서도 모호했다. 그는 나와 직접 만나 북한에 대해 논의하고 싶어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고 우리는 결국 만나지는 못했다.
회신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스페인과 북한 정부로부터 쫓기고 있었고, 미국이 그를 잡아 스페인에 인도할지 여부도 불분명했다. 그도 언론에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내 휴대폰이 울렸다. 에이드리언이었다.
그 다음날 야구 모자와 검은색 바람막이를 입은 키 큰 동양인 남성이 댈러스 바베큐 음식점 타임스퀘어 지점으로 걸어 들어왔다. 시각은 저녁9시 30 분이었고, 장소는 붐볐다. 우리는 코너 자리에 앉았고 에이드리언은 벽을 등지고 있었다. 그는 내 휴대전화를 달라고 했고, 자신의 검은색 파우치에 내 휴대전화를 넣었다. “이렇게 하면 불청객이 엿듣는 것을 막을 수 있죠.”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긴 머리를 “맨번” 이라고 부르는 스타일로 올려 묶었고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마치 해외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처럼 보였다. 피곤해 보이면서도 기민했다.
그 후 에이드리언은 3시간 30분 동안 맥앤치즈를 곁들인 바베큐립 한 접시를 앞에 두고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일과 그가 “자유의 투사”라고 부르는, 북한에도 일부 존재하며 김정은 정권을 타도하려는 비밀조직망에 대해 설명했다. ‘천리마 민방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하면서 에이드리언은 이 조직을 한국의 수천 년 역사를 통틀어 ‘의병’ 으로 비유하며 정부의 실패에 반해 자발적으로 동원한 시민 민병대라고 표현했다.
습격 사건 일주일 후인 2019년 3월 1일은 35년 간의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했던 한국의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 천리마 민방위는 자유조선으로 이름을 개칭하고 북한의 망명정부를 선포하며 웹사이트에 영상을 게시했다. (조선은 500년 동안 지속된 왕조의 이름이며 북한 사람들은 북한을 여전히 조선이라 부른다.) 이 조직이 이제 민병대에서 임시정부로 전환하려고 하고 있었다. 언론은 그 영상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북한 독재 정부에 대한 이런 조직적 저항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대사관 내부자를 통해 “매튜 차오”라는 신분으로 그의 동료들과 함께 대사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초대를 받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무단 침입이 아닙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스페인 언론의 추측과는 달리 자유조선은 정부나 정보기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저는 CIA나 FBI를 위해 일을 하거나 돈을 받거나 훈련을 받거나 그들과 협력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에이드리언이 이 기관들에 고용되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그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 밑에서 북한인권특사를 지낸 제이 레프코위츠는 사회운동가들과 공직자들이 비공식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레프코위츠가 말했다.
자유조선은 “무료 노동, 신용 카드, 일반 정부가 하지 않는 일들에 대한 시도”를 포함한 자원에 의존한다고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는 조직이 알려질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계획은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하고 대사들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조선이 초기에는 FBI 멤버들로부터 암묵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단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FBI는 논평을 거부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 후 며칠 안에 스페인 법원은 이 습격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을 입수했다. 에이드리언은 미국 정부가 결국 북한 편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새벽 1시에 식당을 떠나면서 에이드리언이 휴대폰을 켰을 때, 그의 휴대폰은 그의 안전을 우려하는 조직 구성원들의 긴급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나를 택시에 태워주고 타임스퀘어 속으로 사라졌다.
에이드리언은 거의 매일 밤 나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숨어 있었고 우리의 메시지가 감시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그의 위치를 묻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웅대하면서도 모호했지만, 북한 주민들을 박해에서 해방하려는 자유조선의 목표를 설명할 때에는 명확했고 그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문화적으로 접근이 수월하고 문화적으로 옹호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외에 북한에 대한 특별한 열정은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그저 지구상에서 가장 끔찍한 곳이며 인간의 독창성과 끈기가 악을 위해 사용되었을 때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에이드리언은 1984년, 멕시코 티후아나로 이민을 온 부모님 아래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선교사가 된 태권도 사범이었다. 에이드리언이 6살 때 가족들은 미국 샌디에고로 이사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멕시코에 고아원을 설립했고, 에이드리언은 그곳에 종종 방문해 기증 물품을 전달하고 노숙자들에게 도움을 제공하곤 했다. 이후 그는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도 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의 에이드리언을 알았던 사람들에 따르면 이러한 일을 하는 그의 동기를 종교적이기보단 인도주의적인 차원으로 보았다. 에이드리언도 아버지처럼 태권도를 가르쳤었고 기독교인이지만 내가 그의 신앙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제 개인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저의 관심은 신앙의 자유입니다.”라고 답했다.
에이드리언은 예일대에서 북한 주민들이 처한 곤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03년, LA를 방문했을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에이드리언은 8살 위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폴 킴과 함께 윌셔 대로에 위치한 블링크(Blink)라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 둘은 에이드리언이 폴을 캠퍼스 행사에 초대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이후 종종 만나 북한 주민들을 돕기 위한 단체를 만드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둘 중 한 명이 카페의 간판을 올려다보고 이름에서 “B”자를 빼고 새로운 단체의 이름을 북한의 자유(Liberty in North Korea)라는 뜻으로 링크(Link)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해 초,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조직한 예일대 한인 학생 컨퍼런스에서 이 단체를 출범했다.
“링크의 90%는 에이드리언이었습니다.” 라고 폴이 말했다. 그리고 본인은 서서히 단체에 덜 관여하기 시작했다. “링크는 무언가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대학생들을 찾았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동아리에 가입하죠. 그들은 혼자 있고 싶어하지 않아 해요.”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1999년도부터 활발하게 활동하고 당시 동양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블로그 기반 소셜 네트워크인 “쟝가(Xanga)에 링크(Link)를 구축했다고 말했다. (폴 킴은 동양인 대부분이 다른 집단에 비해 인터넷 중독이었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두세 개의 대학 캠퍼스를 방문하며 에이드리언은 그의 “허름한 단벌 양복”으로 갈아입고 북한 주민들의 삶의 참상에 대해 발표하며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탈출하는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 ‘서울기차’를 상영하기도 했다. 에이드리언은 그의 발표에 동행할 동양계 미국인 가수, 래퍼 및 댄스 크루를 모았다.
넷플릭스 시트콤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에 출연한 34세의 한인 배우 이기홍은 2005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학부생으로 있을 당시 미주한인학생총회에서 에이드리언을 만났다. 이기홍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이드리언과 함께 3시간을 보내면 그는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하게 만듭니다.” 이기홍은 버클리 캠퍼스에서 링크 지부를 설립하는 것을 도왔고 그와 에이드리언은 북한 주민들의 고통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햇볕 프로젝트(Project Sunshine)라는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려고 함께 한국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를 불러서 ‘저기 말이야, 넌 이 엉망인 세상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라고 묻지 않잖아요.” 이기홍이 말했다. “에이드리언과 함께 있으면 그런 일이 가능해져요.”
에이드리언은 4학년 때 예일대학을 중퇴하고 맨해튼의 한인타운에 위치한 고려서적 건물 위층에 링크의 임시 본부를 세웠다. 이후에는 워싱턴D.C로 본부를 옮겼지만 그때 당시 링크 지부가 거의 70개에 달했다. 당시 링크를 시작하는 데 도움을 줬었던 친한 친구 한명은 “에이드리언은 의미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때로 외교적 규범을 벗어나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행정부는 4년 주기로 바뀌기 때문에 북한 정권은 상황에 맞춰 현상 유지를 쉽게 할 수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큰 변화를 이룩한 사람들을 존경했다. 그들 중에는 한국 독립 운동의 지도자 안창호가 있었는데, 에이드리언은 그를 토마스 제퍼슨, 마틴 루터 킹과 비교했다. 에이드리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마주쳤을 때와 관련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대한 마틴 루터 킹의 해석을 좋아했다. “이 사람을 돕기 위해 내가 멈추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돕기 위해 멈추지 않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라는 질문을 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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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인권법에 서명하면서 북한 주민들이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2년 후, 에이드리언과 다른 두 명의 링크 멤버들이 중국 북동부의 연길을 방문하여 지하 쉼터에 숨어있던 탈북여성 4명과 2명의 10대 탈북소년들을 만났다. 탈북자들은 중국 당국에 잡히면 북한으로 송환되어 교화소에 수감되거나 처형을 당할 수도 있다. 에이드리언과 링크 멤버들은 탈북자들의 망명 신청을 위해 가장 가까운 미국 영사관이 있는 선양까지 기차를 타고 20시간 동안 그들과 동행했다. 그러나 영사관 직원들은 중국 정부가 도청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전화로 에이드리언에게 영사관 대신 400마일 떨어진 베이징에 위치한 유엔난민기구에 찾아가라고 통보했다. 베이징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도 연락했지만 그곳에서도 유엔난민기구를 찾아가라고 안내해줬다. 결국 다른 링크 멤버들과 탈북자들은 승합차를 빌려 이동했고, 에이드리언은 비행기로 이동했다. 이동 과정 중에 중국 공안이 고속도로에서 승합차를 세우고 차에 탄 모든 사람을 체포했다. 에이드리언은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체포되었고 그와 다른 링크 멤버들은 약 1주일간 수감된 후에 추방당했다. 탈북자들은 6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링크와 다른 인권단체들이 많은 압력을 가해 붙잡혔던 탈북자들은 다행히 결국 석방되어 한국으로 향했다. 에이드리언은 미국 영사관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2007년 그는 웹사이트 Freekorea.us에 “지난 12월에 겪은 나의 경험은 북한인권법이 통과된 지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의 상황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적었다.
부시 행정부 시절 북한인권특사였던 제이 레프코위츠는 에이드리언이 “효과적이고 열렬한 사회운동가”라고 말했다. 그때쯤 링크는 전세계적으로 100여개의 지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이 겪은 중국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무언가 변화를 가져왔다. 2008년 그는 갑자기 단체에서 탈퇴했다. 당시 그를 알고 있었던 한 기자의 말에 의하면 에이드리언은 모든 것과 연을 끊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에이드리언은 그 기자에게 자신이 워싱턴D.C.를 떠나고 전화번호를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에이드리언이 정계에 입문하거나 정보기관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에이드리언은 수염을 기르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등 나이가 들어 보이도록 스타일링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아무도 스물 몇 살 짜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해 에이드리언은 북한 정권 붕괴 시 북한 시민사회를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조선 연구소라는 싱크탱크를 시작했다. 에이드리언은 북한에는 독립적인 법원, 책임있는 경찰, 교육받은 시민, NGO 및 자유로운 언론이 부재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영국 국회의원과 몽골 및 리비아의 전 지도자들을 포함한 고문들의 목록을 보여주는, 현재는 없어진 웹 사이트 외에는 조선 연구소의 활동에 대한 증거가 많지 않다. 무아마르 카다피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31년 간 망명 생활을 한 전 리비아 부총리 무스타파 A. G.는 에이드리언이 진정성 있는 사람이며 김정은과 카다피 사이의 유사점에 대해 관심있어 했다고 묘사했다. 그는 “에이드리언은 내가 오랫동안 야당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경험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계속적으로 막후에서 일했다. 2009년 열린 링크 자선행사에서 기자 리사 링은 북중 국경을 따라 보도를 하다 북한에 140일 간 구금되었던 그녀의 여동생 로라가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준 에이드리언에게 감사를 표했다. (리사와 로라는 인터뷰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2009년과 2012년 사이에 에이드리언은 TED 펠로우였으며 프린스턴 대학의 정보기술정책센터에서도 1년간 관여했다. TED 펠로우십 프로그램을 공동 창립한 에메카 오카포는 “에이드리언은 침착하고 행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정 정권을 다루는 데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고 현실적이었습니다.” 에이드리언은 리비아 내전 기간 동안 리비아로 떠났고, 카다피가 몰락한 후 인권활동가이자 TED 펠로우인 술레이만 바킷과 함께 민간인 사상자를 위한 의료 서비스를 담당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NGO와 옹호단체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거의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수년 동안 유엔 총회와 인권 이사회는 북한 정권의 인권 침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해왔다. 2014년 유엔수사관들은 “이러한 침해의 심각성, 규모 및 성격은 현대 사회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금년 1월 휴먼라이츠워치가 최신 보고서를 발표했을 때 아시아 담당 국장 존 시프턴은 “북한 사람들은 끊임없는 감시를 받고 있으며 매일 투옥, 고문, 성적 학대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1948년 이후로 줄곧 이래왔습니다.”라고 언급했다. 도널드 트럼프와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원국은 15개국이다. 2019년 12월, 이들 중 8개국은 과거 회의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북한의 인권 침해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지지했다. 이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9번째 국가의 승인이 필요했는데 미국이 이를 거절했다.
“대학 강의, 투어, 콘서트, 베이크 세일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지하 작업을 통해 탈북자들을 구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들이 옳은 일을 할 수 있게 정책을 변경하도록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직접적인 행동이었습니다.” 2010년에 에이드리언은 천리마 민방위를 시작했지만 그 존재를 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 천리마는 한국어로 페가수스의 동의어이며 그는 이 기간 동안 전략자문회사 페가수스의 대표로 활동했다.
2014년 에이드리언은 나에게 “새로운 북한을 위한 새로운 인프라 준비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었다. 5년 후 댈러스 바베큐 음식점에서 그는 지금은 자유조선으로 알려진 당시의 천리마 민방위에 나를 영입하려 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는 15년 동안 준비해 왔습니다. 계속해서 사람들을 조사하고 인터뷰했어요. 이 분야 사람 중 일부는 경력을 쌓기 위한 목적으로 일합니다. 일부는 자기애에 의한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진정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제가 찾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내가 북한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었기 때문에 에이드리언은 나를 북한에 대한 자신의 비탄적인 심정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다.
2015년 1월 1일, 에이드리언은 소셜 미디어에 게시를 돌연 중단했다. 그의 마지막 트윗은 한국의 1919년 독립 선언문의 인용문이었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그의 마지막 기고문은 전월 발매된 미국 잡지 애틀란틱에 실린 영화 “인터뷰”에 대한 글이었다. 이 영화는 두 명의 백인 미국 영웅이 사악한 독재자를 죽이고 북한을 구하는 코미디 내용으로, 북한 정권이 이 영화 제작사인 소니의 컴퓨터를 해킹하도록 촉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북한은 이를 부인했지만 관련 사이버 공격을 “의롭다”고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가장 황폐한 나라 중 하나의 희생을 유희거리로 삼는 영화 “인터뷰”를 불쾌하다고 생각했다. 에이드리언은 “조만간 탈북자들이 자유로워질 날이 올 것이며, 해방된 정치범 수용소 생존자들은 세계가 억압자들의 고통보다 억압자들의 기이함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
2019년 6월, 나는 두 명의 자유조선 조직원과 그 조직의 동지 한 명을 만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우리는 정보를 밝힐 수 없는 한 도시의 어둑하고 한산한 중국 식당에서 만났다. (에이드리언의 변호사이자 전 관타나모 구금시설 폐쇄를 위한 특사인 리 월로스키에 따르면, FBI는 그에게 북한 정부 요원들이 에이드리언과 다른 조직 구성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알렸다.) 자유조선은 주로 한반도 외 지역에서 조직되었다. 한국에 3만3천 명의 탈북자가 있지만 1978년부터 1991년 탈북할 때까지 북한 외교부에서 일했던 고영환은 한국이 북한을 주권국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남한 국민들이 망명 정부를 설립할 경우 그로 인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남북한 관계는 남한 정부의 집권여당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문재인이 이끄는 현 행정부는 북한과의 교류를 장려하고 있으며 탈북자들은 이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할 시 새로운 국적을 잃게 될까 우려한다.
내가 식당에서 만난 두 사람은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이 조직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북한 전문가, 즉 언론인, 정책입안자, 학자와 같은 사람들이 종종 북한의 사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잘못 전달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자신의 전공 학문과 관련된 국가의 언어를 모르는 그런 분야는 세상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저명한 탈북자들의 증언은 대부분 그들이 영어를 못하고 위조된 신분으로 살아간다는 이유로 무시당한다.
세 번째 사람은 북한 출신이었다. 그 조직원은 2008년경 그가 망명했던 서울에서 에이드리언을 만났다. 그들은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킬 방법을 논의했다. 북한 주민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있지만 사회에서 가장 특권을 가진 고위층조차도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우리는 국제적으로 행동 지향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했고 에이드리언이 이에 부합했습니다.”라고 그 조직원이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서구사회에서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다른 조직원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에이드리언은 비탈북자로서 탈북자들만이 하는 일을 실제로 했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2014년에 조직에 합류했다. “급여도, 직함도, 본부도, 배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략과 비전이 있습니다.”라고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세상에 그 누구도, 그 어느 단체도 북한 국가에 저항하며 북한주민들을 대변하기 위해 일하는 곳은 없습니다.” 에이드리언은 조직의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했으며 다른 구성원들이 이를 수정했다. 이 독립선언문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탈북자, 그리고 북한 주민들, 한국인 및 외국인에게 호소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반통일이나 친통일이 아닙니다.” 자유조선 조직원이 내게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미국을 포함한 다른 독립 선언문에서 그 내용을 참고했다. 그는 또한 중국 국가의 한 구절을 가져오기도 했다.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그대는 일어나라!”
2017년 봄, 자유조선의 조직원 40-50명이 뉴욕에 모였다. 그들은 조직활동의 우선순위를 정했고 그 안에는 북한 고위층을 구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까지 1천여명의 외교관, 조선로동당 지도부, 의사 등 정권에 충성한다고 여겨지는 시민들이 탈북했다. 이 고위층들은 일반 주민보다 더 많은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탈북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들이 탈북에 성공하면 다른 북한 고위층들을 자유조선과 연결해준다.
종종 그런 고위층들이 탈북에 성공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바꾼다. 그들의 탈북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초대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이 제정한 ‘연좌제’는 3대까지 적용된다. 2018년 이탈리아 대사 대행과 그의 아내는 로마에 있는 북한 대사관을 떠나 모습을 감추었고 그 위치가 서울로 추정됐다. 그들의 10대 딸은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그 이후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것이 북한 주민들을 제자리에 있게 하는 겁니다. 저항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라고 자유조선 조직원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그래서 북한에 내부 혁명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이 이 단체가 설립된 이유입니다.”
다른 자유조선의 작전들은 김씨 일가를 타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드리드 북한 대사관 사건이 발생한 지 몇 주 뒤인 2019 년 3 월 11 일, 자유조선 조직원들은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북한 대사관 담장에 “자유조선”이라는 단어와 “우리는 일어난다”라는 문구를 자유조선 로고와 함께 적었다. 9일 후 그들은 위대한 영도자인 김정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마드리드 대사관 벽에서 제거하고 땅에 때려부수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 초상화는 북한에서 신성한 것이며 그러한 일은 일반 주민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성윤 미국 터프츠대 한국학과 교수는 “그 금기는 깨졌습니다. 여기엔 역사적으로 강력한 상징성이 있습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자유조선 조직원 중 다른 한 명은 “이 단체가 대중적 상징이 되어 북한 사람들이 해외와 내부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
유럽에서 만난 3명의 조직 관계자는 10개국에 수백 명의 자유조선 구성원이 있다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15 개국 이상에 수천 명이 있다고 추정했다. 두 숫자 모두 확인이 불가능하며 모호함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조직은 탈중앙화 된 방식으로 운영되므로 한 조직원이 체포되더라도 다른 조직원이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조직원들은 암호화된 플랫폼을 이용해 소통하며 상호간 호출부호를 사용한다. 작전 중 직접 만나는 일이 있어도 서로의 진짜 신원은 알지 못한다. 그 비밀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의 느슨한 연결 고리가 내부 사람들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한 조직원이 내게 설명했다. 자유조선은 구획화가 너무 철저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조직 구조가 북한 체제의 불투명함을 연상케 한다. 자유조선을 알아갈수록 에이드리언이 그룹의 규모를 가장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미국에서 만난 자유조선의 한 조직원은 자신이 여러 작전을 수행했으며, 모두 고위층 탈북자 구출과 관련된 임무였다고 말했다. 그는 핵심 구성원 외에도 신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을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라고 불렀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선셋 대로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나와 한 사람과의 미팅을 주선해 주었다. 머리에 금발 브릿지를 넣은 30세 정도의 젊은 동양인 여성이 나에게 다가와 미리 준비된 문구를 말했다. “당신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시나요?” 8년 전 교회에서 에이드리언을 만난 이 여성은 웹 디자인으로 단체를 돕고 때때로 소액 후원을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바쁜 교차로 앞 테이블에 마주 앉았고, 그녀는 노트북을 열어 나에게 카키색 군복을 입은 남자가 소파에 앉아 그의 이름, 공식 직함, 망명 목적지를 밝히는 서류에 서명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 남자가 북한 정부의 고위 관리였으며 자유조선이 사고를 위장해 그의 탈북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정부에 의해 실종 선고를 받았지만 지금은 단체만이 알고있는 장소에서 가명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단일 작전을 위해 모집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26세인 찰스 류는 북한에서 고아로 자랐다. 그는 14살 때 중국으로 탈출했지만 붙잡혀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노동단련대에 수감되었다. 그는 16살 때 다시 탈출했다. 현재 찰스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며 2017년 링크에 IT인턴으로 합류했다. 그는 에이드리언과 이메일을 주고받았지만 그를 돕기 위해 마드리드로 날아간 2019년 2월 전에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류가 말했다. “저는 에이드리언에게서 형제애를 느꼈습니다.” 그는 마드리드 작전을 그가 탈북한 이후 북한 영토에 가장 가까이 갔던 역사적 순간으로 묘사했다. “정말 기뻤고 제 친구, 이웃들과 다시 함께 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대단했어요.”
2017년 2월 14일 저녁 9시, 크리스 안은 마닐라의 한 배낭여행 호스텔 옥상 바에서 다섯 병째 산미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그곳에 지내고 있었다. 버지니아 대학에서 M.B.A를 받기 전 이라크 팔루자에서 복무한 전직 해병대원인 크리스는 친한 친구가 고향으로 휴가를 가자고 제안했을 때 일을 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친구가 일이 생겨 크리스는 결국 혼자 휴가를 떠났다.
옥상 바에 있는데,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에이드리언이었다.
크리스는 자원봉사 경력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 그는 학생봉사동아리인 키클럽에서 활동했다. 이라크에서 돌아온 후에 그는 재향군인 옹호단체에서 일했다. 크리스의 부모는 LA시내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는 한인 이민자였다. 크리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크리스는 부모님의 상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족은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한국인이 많이 사는 치노 힐스 지역으로 이사했다. 크리스는 어머니, 할머니, 동생을 돌보았다. 2000년에 그는 해병대에 입대했고 2005년에 이라크에 파병되어 정보 대대에 합류했다. 팔루자 캠프의 소대 포병 부사관인 마이클 데이비스는 크리스를 “충실한 미국 청년”이라고 묘사하며 “국가와 동료 해병대원에 대한 그의 헌신과 노력이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크리스의 대학원 친구인 라이언 피셔는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이 발표된 날 밤 크리스가 바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모임에 미국 성조기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성조기가 정말 컸어요.” 피셔가 말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큰 성조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국기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2009년, 서로 아는 지인이 크리스를 에이드리언에게 소개했고, 두 사람은 샌디에고의 부리또 전문점인 로리타스에서 만났다. 크리스는 북한의 특수한 상황보다는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더 컸다. “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크리스가 말했다. “그것은 다른 미국인들도 하는 일입니다.”
에이드리언은 한동안 뉴욕에 사무실이 위치했던 조선 연구소 회의에 크리스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북한 전직 군장교를 포함한 탈북자들 몇 명이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해 논의를 했다. 2011년에 그들은 또한 워싱턴D.C.에서 북한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미국 관리들과 30분간 만났다. 크리스는 “그들은 에이드리언이하는 일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전화로 크리스에게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크리스가 마닐라에 있다고 하자 “이런 맙소사, 완벽해.”라고 에이드리언이 반응했다. “김정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도 알지?” 크리스도 알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으로부터 전화를 받기 전 날, 김정일의 장남이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얼굴에 신경작용제를 묻힌 두 여성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살인사건은 잠재적인 라이벌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이복 동생인 김정은이 명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드리언은 크리스에게 김정남의 장남으로 추정되는 김한솔로부터 방금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에 따르면 그 둘은 2013년경 파리에서 서로 아는 지인을 통해 소개받았다. 당시 구찌 신발을 신고 있던 김한솔은 에이드리언에게 자신이 그가 북한과 관련해 하는 일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계속 연락을 취했다. 에이드리언은 “그렇게 돈이 많은 아이를 만난 적이 없어요. 김정남은 일생 동안 많은 돈을 숨겨 두었어요.”라고 나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한솔은 평소 자신의 집을 지키던 마카오 경찰이 실종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서로 아는 지인을 통해 에이드리언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에게 자신의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가능한 한 빨리 마카오를 빠져 나가야한다고 말했다. 김한솔이 여러 국가와 정보 기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어렵지 않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적법한 후계자로 간주되는 한솔은 누군가 그를 생포하던 사살하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이드리언은 이것을 “제로섬 게임”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있었던 에이드리언은 크리스에게 물었다. “오늘밤 대만 공항에 가서 그들을 만날 수 있겠어? 그리고 그들을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주고.” 크리스는 배낭에 옷을 몇 가지 집어넣고는 공항으로 향했다. 그가 대만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지난 후였다. 크리스는 한솔의 항공기편명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위험 유무를 확인할 동안 한솔과 가족이 앉아있을 수 있는 입국 게이트 옆의 작은 국수 가게를 찾아놓았다.
그와 가족은 그날 이른 아침에 도착할 당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위생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당시에도 아시아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한솔은 키가 177 센티미터 정도였고 긴팔 셔츠와 코트를 입고 여행 가방을 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크리스 자신의 어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예쁜 중년의 여성이었다. 청바지를 입고 있던 한솔의 여동생은 10대 후반으로 보였다. 에이드리언은 한솔과 가족에게 크리스가 검정색 티셔츠와 다져스 야구모자를 쓰고 스티브라는 이름에 답할 것이라고 말해놓았다. 한솔은 크리스를 발견하고 “스티브?”라고 말했다.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갑시다.”
크리스는 한솔과 그의 여동생에게는 영어로, 어머니에게는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한솔의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물었을 때 한솔은 크리스를 가리키며 “나는 저 사람을 믿어요.”라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는 가족을 방으로 분리된 공간이 있는 공항 라운지로 데려갔다. 크리스는 한솔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한 방에 모아 아이패드를 건네주고 넷플릭스를 틀어주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한솔의 여동생은 그에게 전형적인 미국 청소년을 상기시켰다. 크리스와 한솔은 옆방에 앉았다. 한 시간 후 에이드리언은 크리스에게 전화하여 네트워크가 한솔과 그의 가족을 받아들이기 위해 3개국과 협상 중이라고 말했다.
크리스는 미국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한솔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했다. 그는 미국식 바베큐와 다양한 지역의 요리 기술이 어떻게 독특한 맛을 내는지 설명했다. 그러고는 한솔에게 물었다 “북한에서 온 건 좀 드문 일이지. 어땠어?” 한솔은 할아버지와 낚시하러 갔던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는 아늑하고 친밀하게 들렸지만 곧 크리스는 한솔이 전 북한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정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늦게 에이드리언은 크리스에게 전화를 걸어 한 국가가 한솔의 가족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으며 암스테르담 외곽에 위치한 스키폴 공항행 비행기표 3장을 구매했다고 알렸다. 그때까지 그들은 약 18시간 동안 대만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크리스는 대기행렬을 따라 가족을 호위하고 게이트 직원에게 티켓과 여권을 건네주었다. 직원이 여권을 확인하자 그는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탑승하실 수 없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그 주 초 김정남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다른 공항에서 그들의 여권이 경보를 울렸을 가능성이 있다.) 크리스는 줄을 보며 “하지만 아직 탑승중인 사람이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남자는 “이 분들은 탑승 불가합니다!”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에이드리언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에 연결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당신도 그들이 탑승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잖아요.”라고 말했다.
크리스와 그 가족은 라운지로 돌려보내졌다. 몇 시간 후 자신을 CIA요원이라고 말하는 두 명의 남성이 나타났다. 웨스라는 이름의 한국계 미국인과 나이가 있는 백인 남성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크리스가 차고 있는 이라크 전쟁 참전 기념 팔찌를 발견했다. 크리스는 그들에게 자신이 참전 군인이었다고 말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저는 제 조국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미국에 있지 않고 법을 어기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당신들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한솔과의 대화를 요청했다. 크리스는 한솔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가 이해하기 전까지는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CIA는 논평을 거부했다.)
다음날 아침 공항 직원이 찾아왔다. 그들은 훨씬 더 친절하게 행동했고 크리스가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새 티켓을 예약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한솔은 안도하는 듯했다. 그러나 웨스가 크리스에게 자신도 그 가족과 함께 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크리스를 걱정시켰다. 헤어지기 전에 크리스는 에이드리언의 지시에 따라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한솔이 그의 안전을 보장해준 크리스와 에이드리언에게 감사를 표하는 영상을 찍었다. (천리마 민방위 웹사이트에서, 자유조선은 한솔의 경유를 승인하고 그의 가족을 돕겠다고 약속한 로디 엠브레히트 주한 네덜란드 대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엠브레히트는 이 기사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 그 둘은 함께 셀카도 찍었다. “이것은 일종의 보험 정책이었습니다.” 크리스가 내게 말했다. “우리가 한솔을 납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영상은 아버지가 암살된 지 며칠 뒤 한솔이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3주 후 영상은 유튜브에 게시되었고 한솔과 천리마 민방위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게이트에서 한솔은 크리스와 작별인사를 하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자유조선에서 파견한 팀이 네덜란드 인권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함께 스키폴 공항의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엠브레히트 대사는 한솔과 그의 가족이 네덜란드에 입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입국게이트에 나타나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한솔이 자신에게 전화를 해서 게이트로 나오려고 했지만 옆문을 통해 공항에 있는 호텔로 이동됐음을 알려왔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에이드리언은 한솔에게 네덜란드로 망명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한솔은 그렇게 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에이드리언은 자유조선 멤버들과 변호사에게 해당 호텔의 로비로 가면 한솔이 내려올 것이라고 전달했다. 그러나 한솔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출처에서 내게 CIA가 한솔과 그의 가족을 다른 곳으로 데려 갔다고 말했지만, 그들이 네덜란드에 있는지 아니면 다른 나라에 가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유조선이 파견한 한 조직원은 “정부간 연합이 이뤄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외교부와 정보 기관이 서로 충돌하는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수미 테리 전 CIA 대북분석관이자 전략국제연구센터의 선임 연구원은 “에이드리언이 CIA에게 한솔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
에이드리언은 중국에서의 체포 이후 한솔을 잃은 것을 자신의 경력의 두 번째 실수라고 지칭했다. 그는 한솔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탈북자라고 느꼈지만 그러나 에이드리언의 궁극적인 목표는 김씨 일가의 타도이고 한솔은 그 일가의 소속이다.
“이런 정권은 천천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즉시 발생합니다. 모든 혁명은 그런 식이며 북한의 경우에도 동일할 것입니다.”라고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저는 비유적인 의미로서의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혁명이 아닙니다. 또는 평양에서 오십만 명의 사람들이 시위를 하면 그 정권이 단순히 가방을 싸고 떠나서 일종의 과도 정부가 등장하는 환상같은 것이 아닙니다. 북한은 다른 여느 국가와 달라서 그들에게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그 국가의 자유화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어떤 개방이나 개혁은 그들의 불안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들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강제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마드리드 대사관 작전의 동기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자유조선의 일원들은 크리스 안과 미국 시민인 샘 류를 포함한 팀이 대사관의 누군가로부터 탈북을 위한 도움을 요청받은 후 스페인으로 날아갔다고 주장한다. 에이드리언을 포함한 일부 핵심 조직원들은 구조 과정 중에 대사관을 장악하는 것을 제안했다. 주스페인 북한 대사는 북한이 핵무기 실험을 강행한 후 2017년에 추방됐고 대사가 없는 대사관은 적절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내가 유럽에서 만난 자유조선 탈북자 조직원은 조직과 연계된 평양 내 사람들이 그 시도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고, 그 문제를 놓고 의견들이 나뉘었다고 했다.
이견은 가장 고위급 탈북자 두 명과의 인터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2016년 탈북한 전 주영국 북한 대사관 공사이자 현재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인 태영호 의원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세계가 북한 대사관을 외교 기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조선은 불법적으로 대사관에 침입하여 사람들을 포박했습니다. 저항은 좋지만 합법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반면, 10년 넘게 북한 대사관에서 일했던 고영환 씨는 “북한 대사관을 서구의 정의에 따라 일반적인 대사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입니다. 무기 거래 중개에서 위조 돈 세탁, 김정은의 사치품 운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법 행위가 내부에서 발생합니다.”라고 말했다.
태영호 의원은 “탈북하려는 사람이 자신의 구조를 위해 자유조선이 대사관에 침입하도록 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작전에 대해 잘 아는 한 소식통은 구조를 요청한 사람이 탈북한 것으로 알려지면 북한에 남아있는 그의 가족이 죽게 될까 봐 그걸 염려하여 납치로 위장을 하도록 요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저는 가슴에 최고지도자 배지를 달고 문으로 갔어요.”라고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제 스페인어는 그다지 유창하지 않습니다. 스페인어를 사용한 지가 너무 오래 됐어요.” 그가 덧붙였다. “저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죠. 뒷편 큰 방에서는 보안 카메라를 통해 팀원들이 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에이드리언은 잘못된 경보였다고 경찰에 말했다. “경찰이 가고 제가 돌아왔을 때 조직원들은 ‘당신이 해냈어!’라며 기뻐했어요.”
그러나 경찰의 방문은 구조를 요청했던 북한 사람을 겁먹게 했다. 얼마 후 대사관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는 울리고 또 울렸다. 자유조선 회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고민했다. 마치 외부의 누군가가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있는 것처럼 전화가 계속 울렸다. 대사관의 내부 인테리어는 단조로웠고 방들은 동굴처럼 소리가 울렸다. “그들이 알아차렸어요. 그들이 압니다, 그들이 알아요!” 그 북한 사람이 말했다. 그는 마치 사방에 감시하는 눈이 있는 것처럼 느꼈고 조직원들에게 그가 더 이상 탈북하고 싶지 않으며 그들이 가능한 한 빨리 떠나야한다고 말했다.
밤이 되었다. 자유조선 조직원들은 대사관의 전자장비 일부를 챙긴 다음 차량을 가지고 각기 다른 공항으로 흩어져 대부분이 뉴욕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에이드리언의 지시에 따라 자유조선 조직원들은 스페인 정부에 이메일을 보내서 스페인에 입국하는 북한 국적자들을 감시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대사관 내부 사람들이 북한 정부에 의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뉴욕에서 에이드리언은 두 명의 FBI요원을 만났다. 수년 동안 그들은 에이드리언이 해외에 갔다 귀국하면 그에게 연락하여 확인을 하곤 했었다. 요원들은 그가 급습에 가담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대사관 컴퓨터를 본 적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모든 북한 대사관에는 은밀한 작전이 실행되는 보안 통신실이 있다. 단체가 가지고 있던 컴퓨터는 그 방에서 나온 기기였다. “전 세계의 모든 북한 통신 보안을 뚫을 수 있습니다.”라고 에이드리언이 내게 말했다. “이것은 판도를 바꿔놓을 거예요.”
에이드리언은 FBI 요원들에게 컴퓨터를 보여주기로 동의했고, 그들이 그의 호텔로 오기로 했다. 에이드리언은 미팅에 앞서 타임스퀘어의 한 버블티 가게에서 전 CIA 대북 분석관이었던 수미 테리를 만났다. 그가 그녀에게 “마드리드에 대한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수미 테리가 말했다. 그들은 그가 묶는 호텔로 걸어갔고, 그곳에서 그는 몇명의 한국 교포 청년들을 그녀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대사관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컴퓨터도 보았다. 에이드리언은 그녀에게 FBI도 이걸 보기 위해 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FBI 요원들이 도착했을 때, 에이드리언은 그들이 컴퓨터를 분석하도록 14일 동안 넘겨주기로 동의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FBI가 무엇을 찾아내던 그 내용들이 김씨 정권에 대한 더 강력한 제재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다른 여러 하드 드라이브와 USB도 주기로 했다. 그 컴퓨터들은 암호화되어 있었고, 에이드리언은 그의 조직보다 FBI가 그 암호를 풀어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 요원들은 대사관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물었지만 에이드리언은 정보 제공하기를 거절했다.
다음날 아침, 에이드리언의 호텔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FBI 요원 한 명이 호텔에서 한 소녀가 실종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여권을 요구했다.
그 때쯤 크리스 안은 LA로 돌아와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그에게 FBI가 그와 얘기하고 싶어한다고 하자 크리스는 자신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약 일주일 후, 해외 업무를 담당하는 FBI 요원 2명이 방문했다. 크리스는 그들에게 차와 쿠키를 대접하고 마드리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에게 설명했다.
에이드리언은 컴퓨터를 돌려받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 법원은 그를 습격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하고 그의 인도를 요청했다. 에이드리언은 최대 28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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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스 바베큐에서 만난 후 몇 주 동안 나는 나와의 대화를 지속하는 에이드리언의 동기에 의문을 품었다. 그가 나를 증인으로 필요로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직면한 위험보다는 북한 주민들의 곤경에 초점을 맞췄지만 송환과 북한 암살자들의 위협이 그를 짓누르는 듯했다. 한번은 밤이 깊었을 때, 나는 그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고, 그는 “보통 그저 피곤할 뿐이에요”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어떠한 정부의 보호나 자금 지원 없이 오랫동안 이 일을 하는 게 피곤해요. 어떠한 특권도 없이 정부의 책임을 맡는 일이 어렵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 조직이 무너질까봐 가장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자유조선이 아직 해야할 일의 3퍼센트밖에 달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2019년 4월 6일, 에이드리언은 FBI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다른 조직원들의 목숨에 대한 북한의 위협이 있으며 보안 조치를 취하고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내게 문자로 이렇게 보내왔다. “구조요청을 하라고 한 건 그들인데 결국 우리를 내친 건 그들입니다. ”
지난 4월 18일, 미국 경찰들은 LA 시내에 있는 에이드리언의 아파트를 급습했는데 당시 방문 중이던 크리스만 발견되었다. 크리스는 체포되어 3개월 동안 투옥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는 그의 스페인 송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청문회를 기다리고 있다.
그날 늦은 오후 5시 43분에 에이드리언은 나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내왔다. “저와 연락이 안되면 제 변호사에게 연락하세요. 제가 체포될 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10시 41분에 그는 또 다른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하나 보내왔다. “한동안 저와 연락이 안될 수 있습니다.” 이어 오전 1시에 링크가 하나 왔는데 그 링크는 70 년대 미국과 협력했던 캄보디아 지도자 시소왓 시리크 마타크 왕자가 쓴 편지로 이어졌다. 크메르 루즈가 그를 처형하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어야 하지만 내가 이곳, 내가 사랑하는 조국에서 죽는다면 참으로 유감이오. 나는 단지 미국인들, 당신을 믿는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오.”
곧이어 법무부는 에이드리언을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려 그가 마지막으로 운전하는 모습이 찍힌 자동차 모델을 공개하고 그를 “무장한 위험인물”이라고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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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인 5월 초, 내 전화기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밥 먹은 곳이 어디였죠?”라는 메시지가 떴다.
“댈러스 바베큐”라고 나는 대답했다.
“맛있었습니까? 당신의 답변이 추후 진행 여부를 결정할 겁니다. 농담이에요. 형편없는 음식이었죠.”
에이드리언은 1년 넘게 숨어 지냈다. 그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연락한 적이 없다고 했고, 미국 정부에 대한 분노로 차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면서 우리를 지하로 보내고서는 우리가 지하로 들어가는 것도 매우 어렵게 만듭니다.”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그는 법무부의 ‘지명수배’ 포스터가 북한 공작원들이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지침이나 다름없다고 느꼈다.
그는 전화통화로 4시간 동안 북한을 해방시키기 위한 자신의 비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 순간 예일대 학생회장이었던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우리는 이 정권을 제거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북한 주민들이 자유롭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까지 무력으로, 우리의 이념의 힘으로, 그리고 우리의 몸으로 맞설 겁니다.” 그는 조직의 목표는 “타도”라고 말했다. 그가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고 했다. “그것은 봉기, 혁명입니다.”
수키김은 저널리스트이며 소설가이다. 그녀의 최근 저서로는 “Without You There Is No Us: Undercover Among the Sons of North Korea’s Elite (한국 번역본: 평양의 영어 선생님)”가 있다.